지난 12일(현지시간) 베트남 붕따우시 내 공사장에서 SK어스온이 참여하는 15-1/05 광구 사업의 ‘황금낙타 구조’ 플랫폼 제작 현장. [사진=SK어스온 제공] [헤럴드경제(붕따우)=고은결 기자] 지난 12일(현지시간) 오전 찾은 베트남 붕따우시. 선박 부두 인근의 넓은 공사장에선 SK이노베이션 자회사 SK어스온이 참여하는 15-1/05 광구의 ‘황금낙타 구조’ 생산 플랫폼 건조 작업이 한창이었다. 38도에 가까운 무더위 속 현장 곳곳에선 중장비, 크레인 등이 내는 굉음이 울려퍼졌다.이곳에선 해상 석유기지의 핵심인 자켓(하부 구조물)과 탑사이드(상부 설비)의 제작이 이뤄진다. 총 4000억원이 투입된 이 플랫폼은 약 2년 6개월에 걸쳐 건조되며, 완공 시 2039년까지 해상에서 원유를 생산하는 전초기지로 활용될 예정이다. 플랫폼 설치는 베트남 국영 석유사 페트로베트남의 자회사 PTSC가 맡고 있다. 현재 자켓의 공정률은 약 75%로, 오는 7월 완공이 목표다. 탑사이드는 30% 진행됐으며, 전체 플랫폼의 완공 및 원유 생산은 내년 10~11월로 예정돼 있다.자켓은 올 하반기 완공 후 바지선에 실려 바다로 운반되며, 해상 크레인을 통해 해저에 내려진다. 이후 기둥마다 100m 길이의 강철 파일(못)을 박아 해저면에 고정된다. 완공 시 플랫폼의 전체 높이는 자켓 60m, 탑사이드 30m를 더해 약 90m에 달하며, 총중량은 8000톤(t)을 넘는다. 탑사이드엔 시추정에서 올라온 원유, 가스, 물을 분리하는 장비가 들어선다. SK어스온 관계자는 “단순히 시추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해상에서 원유·가스·물 분리를 1차적으로 진행하는 간이 정유공장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완공 후에는 하루 2만배럴의 원유가 생산될 예정이며, SK어스온은 지분 25%에 해당하는 5000배럴을 확보하게 된다. 15-1/05 광구 플랫폼 생산 현장. [SK어스온 제공] “탐사 성공률 10%인데 3연속 성공…E&P의 꽃” 베트남은 SK어스온에 유독 특별한 지역이다. 현재 베트남에서는 대부분 탐사 단계부터 참여해 생산까지 전 과정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 산과 숲의 의미와 가치가 변화하고 있다. 가치와 의미의 변화는 역사에 기인한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황폐화한 산을 다시 푸르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어렵고 힘든 50년이라는 혹독한 시간을 보냈다. 산림청으로 일원화된 정부의 국토녹화 정책은 영민하게 집행됐고 불과 반세기 만에 전 세계 유일무이한 국토녹화를 달성했다. 이제 진정한 산림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산림을 자연인 동시에 자원으로 인식해야 한다. 이데일리는 지난해 산림청이 선정한 대한민국 100대 명품 숲을 탐방, 숲을 플랫폼으로 지역 관광자원, 산림문화자원, 레포츠까지 연계해 지역 경제 활성화에 미치는 영향을 모두 100회에 걸쳐 기획 보도하고 지역주민들의 삶을 조명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드론으로 촬영한 충북 단양의 죽령 옛길숲. (사진=단양국유림관리소 제공) [단양=이데일리 박진환 기자] 매년 봄이면 철쭉으로 유명한 소백산은 충북 단양과 경북 영주에 걸쳐 자리잡은 명산 중의 명산이다. 322㎢의 면적으로 지리산, 설악산, 오대산에 이어 4번째로 넓다. 1987년 우리나라 18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한반도의 대동맥인 백두대간(白頭大幹)은 태백산을 지난 뒤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소백산을 조성했다. 소백산 산길 중 경북 영주 풍기읍 수철리에서 충북 단양군 대강면을 넘어가는 험준한 고갯길이 바로 죽령이다. 지난 2000여년 동안 문경새재, 영동 추풍령과 함께 교통의 요지였다. 바람이 거세고 소낙비가 거세고 도둑이 거세다고 해서 ‘삼재령’이라고도 했고 풍치가 아름답고 길손이 반갑고 주막 인심이 좋다고 해서 ‘삼풍’이라고도 불렸다. 소백산 국립공원 입구에 설치된 죽령 표시판. (사진=박진환 기자) 바보 온달·신라의 마지막 경순왕·퇴계 이황 등 2000여년 역사·전설이 만나는 길이 일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하게 영토싸움을 벌이던 삼국시대 군사적 요충지였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아달라왕 5년(158년)에 춘사 죽죽(竹竹)이 길을 열었고 고구려 장수왕(450년경) 때는 고구려의 영토였으며 신라 진흥왕(551년) 때 다시 신라가 회복했다’고 기록돼 있다.삼국 통일 직전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이며 장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