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하남시 동서울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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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oreo 작성일25-05-12 00:43본문
경기 하남시 동서울변전소 전경. 한국전력공사 제공 동해안에서 경기도 하남까지 국내 최장, 최대 규모의 초고압 직류 송전망(HVDC)을 구축하는 프로젝트가 경상북도·강원도·경기도에 걸친 전 구간에서 주민 합의를 받았다. 한국전력공사는 동서울변환소 증설 문제만 남겨둔 상황에서 해당 지역 주민 합의를 위해 총력을 다할 계획이다. 한전은 11일 ‘동해안-동서울 HVDC 송전선로’가 통과하는 79개 마을 전 구간에서 주민 합의를 100% 완료했다고 밝혔다. 동해안의 경북 울진에서 경기 하남까지 280km(철탑 436기)의 이번 송전선로는 수도권에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핵심 기반시설이다. 한전 관계자는 “전력망 확충이 국민의 일상생활과 미래산업을 결정짓는 상황에도 일부 지방자치단체와 주민 반대로 전력 설비 건설은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그러나 동해안-동서울 HVDC 송전선로 경과 마을 주민과 지자체가 동해안에서 생산된 전기의 수혜지가 아님에도 국익을 고려해 대승적으로 사업에 협조하기로 하였다는 점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설명했다. 다만 송전선로의 종착지에 해당하는 하남 동서울변환소 증설 문제는 아직 주민 합의에 이르지 못한 상태다. 동서울변환소 증설사업은 지난 12월 경기도 행정심판 위원회로부터 ‘하남시의 동서울변전소 옥내화 및 변환설비 증설사업 인허가 불허처분 취소결정’ 판결을 통해 사업추진의 정당성을 법적으로 확보했다. 그러나 하남시 측은 행정심판 이후 충분한 숙려기간을 가졌음에도 변환소 건설을 위한 선행사업인 변전소 옥내화 인허가만 처리하고, 정작 중요한 변환설비 증설사업은 주민 수용성 부족을 사유로 인허가를 현재까지도 미루고 있는 상황이다. 한전 측은 “하남시의 인허가가 계속 지연될 경우, 값싼 전기를 만드는 동해안 발전설비와 280km에 달하는 송전선로를 모두 건설해 놓고도, 마지막에 전기를 받아줄 변환소가 없어 그간 투입된 막대한 건설비용과 범국가적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라며 “이로 인한 전기요금 상승의 피해는 고스란히 모든 국민들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한전은 지난 4월 하남시장과 한전사장 간 면담 이후 한전·주민 간 ‘소음·경관 개선 상생협의체’를 통해 주민이 원하는 변전소·변환소 디자인을 선정하고 동서울변전소 주변지역 발전을 위한 상생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HVDC 소통라운지를 만들어 주민들과 적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기자말>[이영천 기자]이 고갯마루에선 한여름 바람마저도 살을 에듯 날카롭다.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세우려던 한 사내와 수십만 민중의 꿈이 여기서 꺾여서이다. 사내와 그들이 끝내 넘지 못한 우금티다. 그 후 맞닥뜨릴 통탄의 역사를 예비했을까? 1894년 겨울은 처절하고도 모질었다. 작금 우리는 이 고개를 넘어섰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치 떨리는 분노를 감내하고 있으니 말이다. 가급 한겨울에 이 고개를 넘고 싶었다. 2024년 12월 불어온 내란 광풍을 이겨내자는 심정에서다. 그것이 공주를 만나는 참모습이라 생각했다. ▲ 우금티우금티를 관통하는 터널 위에서 공주시내 쪽으로 바라 본 모습.ⓒ 이영천 신록 가득한 고갯마루에서 사위를 둘러본다. 길게 늘어선 급경사 산들이 마치 태산준령 같다. 고을의 동-남-서를 산이 빙 둘러막았으니, 공들여 성벽을 쌓을 무슨 까닭이나 있었을까? 산에 갇힌 도시가 한줄기로 뻗었다. 도로와 물길이 나란하다. 이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금강을 향해 함께 흐르고 달린다. 골짝마다 집과 건물이 오밀조밀하다. 좁은 공간이 높은 건물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역설적으로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해 냈다. 마지막 충청감영 도시다. 감영을 성곽에 가두지 않았고, 따라서 곳곳에 관청과 민가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이괄의 난을 맞은 비겁한 왕이 허겁지겁 도망쳐왔다. 난이 평정되었음에도 한참을 돌아가지 않았으니 공산성 풍경에 반했을까, 인심이 후했을까, 그도 아니라면 천하의 겁쟁이였을까. 고려 현종도 난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치듯 몽진했으니, 공주가 방어는 물론 살기 좋은 고장이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겠다. ▲ 공주 시가지공산성에서 바라 본 공주 시가지. 멀리 우금티 쪽으로 감영 뒷산인 봉황산이 보인다.ⓒ 이영천 옛 지도를 들고 성안을 누비려 한다. 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