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정유재란에서 나라를 구한 건 조선의 백성들과 의병1592년 임진년 4월 13일, 왜(倭)가 일으킨 난이 일어납니다. 7백여 척의 군함을 타고 몰려온 20만의 왜군은 순식간에 부산진을 점령하고, 수도 한양을 향해 물밀듯이 밀고 올라갑니다. 개전 초기 조선의 관군은 오합지졸의 극치로서 대나무 쪼개지듯 왜군에 연전연패를 당하면서 거의 궤멸되다시피 합니다.왕(王)이란 자는 무능력한 데다가 겁도 많아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조선군이 완패했다는 장계를 받자마자 그 즉시 한양을 떠납니다. 선조가 백성들을 버리고 새벽에 경복궁 뒷문으로 달아났다는 소식은 백성들에게는 조선이 망했다고 받아들여질 정도로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습니다.조선을 구한 것은 백성들이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우후죽순으로 양반과 상놈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승려들까지 의병을 조직해 궐기했습니다. 이들은 결사항전으로 왜군과 맞서 싸웠습니다. 걸음아 나 살려라 꽁지 빠지게 달아난 선조와 그의 관료들과는 백팔십도 달리 나라와 백성을 구한 애국자들은 장삼이사 민(民)이었습니다.유비무환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던 이순신의 수군이 왜의 수군에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비결도 전후방에 걸쳐 백성-의병들과 신뢰를 바탕으로 튼튼한 연대연합의 전선이 구축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1597년의 정유재란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2024년 12.3 비상계엄 쿠데타는 민주공화국을 마구잡이로 약탈하며 마적떼 패거리가 일으킨 윤석열의 난(亂)이었습니다. 그러나 순식간에 여의도에 몰려온 수많은 주권자 국민의 비폭력 저항과 응원봉 연대연합의 힘으로 윤석열의 난은 진압되었습니다. 그리고 광장정치의 시민정치행동과 연대한 여야 국회의원 204명의 탄핵연대로 윤석열을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내렸습니다.전쟁은 전쟁의 원인이 뿌리까지 제거되지 않는 한 늘 재발합니다. 5.1 조희대의 사법 쿠데타는 정유재란과 똑같은 을사재란(乙巳再亂)입니다. 윤석열의 난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생생하게 입증해 주는 1% 엘리트 대법관 귀족들의 난입니다.6공 구체제에 기생하는 1% 엘리트 귀족들은 사법부와 행정부, 입법부를 비롯한 민주공화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전 분야에 깊이 뿌리내리고 또아리를 틀고 있습니다. 이들을 뿌리까지 뽑아 평범한 장삼이사의 주권자 시민으로 신분 이동시키지 않는 7일 저녁 경북 경주시에서 지진이 잇따라 발생했다.8일 기상청에 따르면 경주시 남서쪽 17㎞ 지역에서 전날 오후 7시 55분 7초쯤 규모 2.0 지진에 이어 오후 11시 8분 53초쯤 규모 2.5 지진이 발생했다.첫 번째 지진과 두 번째 지진 진원의 깊이는 각각 15㎞와 16㎞로 추정됐다. 경주지진 진앙지. 기상청 제공 두 번째 지진의 경우 주변 지역에서 지진동이 꽤 느껴졌을 수 있다. 최대 계기진도는 경북은 3, 경남·대구·울산은 2로 추산됐다.계기진도 3은 '건물 위층 등 실내에 있는 사람은 현저히 느끼고 정차한 차가 약간 흔들리는 정도의 진동', 2는 '조용한 곳이나 건물 위층에 있는 소수가 느끼는 정도의 진동'이 있는 경우를 말한다.이날 잇따른 지진으로 경북 지역에서는 8건의 유감신고가 이어졌고, 피해신고는 발생하지 않았다.한편 이날 지진이 발생한 곳은 2016년 9월 12일 국내 지진 계기관측 이래 최대인 규모 5.8의 경주 지진이 발생한 곳에서 약 10㎞ 떨어졌다.1978년 이래 이날 지진이 발생한 진앙 반경 50㎞ 내에서 규모 5.0 이상 지진 3차례를 비롯해 규모 2.0 이상 지진이 380차례 발생했다.대부분은 경주 지진의 여진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경주=이영균 기자 lyg0203@segye.com